요즘 하루를 돌아보면 이상한 감각이 남는 것 같습니다.
분명 해야 할 일들을 다 해냈고, 계획했던 습관도 빠짐없이 지켰습니다.

운동도 했고, 기록도 남겼고, 해야 할 루틴도 정해진 순서대로 끝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루가 어땠냐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기억이 잘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통째로 하나의 흐릿한 덩어리처럼 느껴집니다.
습관이 많아질수록 삶은 정돈됩니다.
하지만 그만큼 지금 이 순간을 체감하는 감각은 조금씩 옅어집니다. 이 글에서는 왜 습관이 늘어날수록 현재에 머무는 감각이 사라지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습관이라는 이름으로 편리함을 얻는 대신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차분히 돌아보고 싶습니다.
습관은 시간을 빠르게 통과시키는 장치가 됩니다
습관의 가장 큰 기능은 생각을 줄이는 데 있습니다.
매번 판단하지 않아도 되니 에너지가 절약됩니다.
문제는 이 편리함이 시간을 압축한다는 점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순간, 시간은 속도를 냅니다.
익숙한 길을 운전하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이동 과정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습관도 비슷합니다.
행동은 분명 있었지만, 그 사이의 감각은 빠져나갑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식하는 대신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넘어갑니다.
습관이 적을 때는 행동 하나하나가 비교적 또렷합니다.
처음 시작한 운동, 처음 써보는 기록 방식, 처음 시도한 생활 루틴에는 낯섦이 있고 집중이 있습니다.
하지만 습관이 쌓일수록 그 과정은 점점 자동화됩니다.
자동화된 행동에는 감각이 개입할 여지가 줄어듭니다.
이때부터 하루는 여러 개의 습관 블록으로 구성됩니다.
각각의 블록은 매끄럽게 이어지지만, 블록 사이의 여백은 거의 남지 않습니다.
여백이 사라진 시간에는 현재를 느낄 틈이 없습니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잘 굴러갔지만, 손에 잡히는 장면은 남지 않습니다.
현재를 느끼는 감각은 예측 불가능함에서 나옵니다
지금 이 순간을 느낀다는 건 단순히 눈앞의 일을 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측할 수 없고, 조금은 불안정한 상태에서만 현재 감각은 또렷해집니다.
다음에 무엇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면, 뇌는 현재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습관이 많아질수록 하루는 예측 가능한 구조가 됩니다.
언제 일어나고, 무엇을 하고, 어떤 순서로 마무리할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이 안정감은 분명 장점이지만, 동시에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경험은 대부분 계획되지 않은 장면에서 생깁니다.
우연히 들은 말, 예상하지 못한 감정의 흔들림, 계획과 다른 선택에서 현재는 선명해집니다.
하지만 습관이 촘촘할수록 이런 틈은 줄어듭니다.
그래서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하루를 기억이 아니라 체크로 평가하게 됩니다.
잘했는지, 빠진 건 없는지, 흐트러진 부분은 없었는지를 기준으로 하루를 정리합니다.
감정이나 감각은 부차적인 요소가 됩니다.
지금 이 순간은 관리 대상에서 빠져나갑니다.
삶이 매끄러워질수록 기억은 줄어듭니다
기억은 강한 감각에서 만들어집니다.
익숙하지 않거나, 감정이 개입되거나, 집중이 필요한 순간에 기억은 오래 남습니다.
반대로 매끄럽게 흘러간 하루는 기억할 지점이 적습니다.
습관이 많아질수록 삶은 효율적으로 정리됩니다.
불필요한 고민은 줄고, 시행착오는 최소화됩니다.
하지만 그만큼 하루는 균질해집니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가 작아집니다.
이때 자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요즘 시간이 너무 빨리 간다는 말입니다.
사실 시간 자체가 빨라진 건 아닙니다.
기억할 장면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되돌아볼 때 압축되어 느껴질 뿐입니다.
습관은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주지만, 모든 순간을 같은 밀도로 채워버립니다.
밀도가 일정한 시간에는 굴곡이 없습니다.
굴곡이 없는 시간은 기억을 남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삶이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간 것처럼 느껴지고는 합니다.
습관이 많아지는 건 잘 살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자기 관리를 하고 있고, 삶을 주도하고 있다는 감각도 줍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지금 이 순간을 느끼는 감각이 점점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은 자주 이야기되지 않습니다.
모든 습관을 줄이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다만 습관으로 채워지지 않은 시간, 의도적으로 비워둔 순간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정해두지 않은 시간입니다.
지금 이 순간은 계획표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체크리스트로 관리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멈추었을 때, 자동화된 흐름에서 잠시 벗어났을 때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습관이 삶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건 게을러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감각을 되찾아야 할 시점이라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늘 하루를 돌아볼 때 장면 하나라도 선명하게 떠오른다면, 그 하루는 충분히 살아낸 하루였다고 생각합니다.